[김의호 칼럼]하이눈의 리더들

[김의호 칼럼]하이눈의 리더들

  • 기자명 김의호 더퍼블릭 논설위원
  • 입력 2021.03.31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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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의호 더퍼블릭 논설위원

[더퍼블릭 = 김의호 더퍼블릭 논설위원] 공동체에 위기가 닥쳤올 때 대중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리더라는 자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리더의 진정한 역할은 무엇인가? 그 답을 놀라울 정도로 예리하게 표현한 영화가 있다. 수정주의 서부극의 걸작 <하이눈> (1952)이다.

70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대중의 속성과 속칭 리더들의 기본적인 사고와 행태는 좀처럼 바뀌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배경은 남북전쟁이 종료된 지 오래지 않은 뉴멕시코주의 어느 마을이다.

엄정한 법 집행으로 마을의 질서를 바로잡은 보안관 윌 케인. 그는 임기를 마치는 날 주민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린다. 신부와 인생의 새출발을 기약하며 마을을 떠나려던 순간 그의 발목을 붙잡는 소식이 전해진다.

5년 전 자신이 잡아가둔 악당, 프랭크 밀러가 사면을 받고 일당을 규합해 정오(하이눈)에 마을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케인을 처리하고 자신들의 영역을 되찾는다는 게 목적이었다. 서둘러 떠나라는 주민들의 권유와 평화주의 퀘이커교도인 신부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는 마을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다시금 총을 잡는다.

남은 시간은 한 시간 여 분. 그는 과거 밀러 제압을 도왔던 주민들이 그때처럼 힘을 보태주리라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변했다. 하나같이 그를 외면하는 친구들, 심지어 밀러의 하수인을 옛친구 마냥 반기는 주민들을 접하며 그는 절망하게 된다. 이 와중에 보안관 승진 청탁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조수마저 그를 등진다.

케인이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교회. 예배를 중단하고 케인이 요청한 의용대 참여 여부를 놓고 교인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진다.“부녀자가 백주에 외출도 못했던 시절을 잊었는가,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잊었는가”함께 맞서 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나.“밀러가 오긴 오냐”는 현실 부인론, 밀러를 사면시킨 북부 정치인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정치 성토론, 봉급을 주고 치안을 맡겼으니 보안관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방범 위탁론, 케인과 밀러 간의 문제이니 주민들이 관여할 바 아니라는 공사(公私) 구분론 등 공리공론의 줄기찬 공세에 이내 묻혀버리고 만다.

이미 경험했던 위협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데도 자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치 않는 점에서는 주민 대다수가 매일반이었다.

무뢰배가 사라졌던 5년이란 평화의 시간은, 그들의 만행과 횡포를 망각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결국 케인은 단 한 명의 동지도 얻지 못한 채 홀로 밀러 일당과 맞서게 된다.

어차피 악당과의 대결이 영화의 주제가 아니었으니 총격전은 대충 케인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숨어서 지켜보던 주민들이 케인 주위로 모여들지만 그는 말없이 보안관 뱃지를 바닥에 던져버린다. 신부를 마차에 태우고 마을을 떠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영화에서는 위기를 대하는 네 가지 유형의 리더가 등장한다. 이들은 주민 여론의 향배를 좌우할 영향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첫 번째, 개인의 안위를 앞세우는 리더다. 치안판사는 밀러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황망히 도피의 길에 오른다. 사형 선고에 대한 보복이 두려웠던 것이다.

중지를 모아 달라는 케인의 요청을 단박에 거절한다.“기원전 5세기경 아테네 시민들은 그들이 추방했던 폭군이 몇해 뒤 용병을 이끌고 다시 나타났을 때 성문을 열어주고 환영했네. 그리고 관리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구경했네”자신의 떳떳치 못한 처신을 염량세태(炎涼世態)를 따르는 대중의 탓으로 돌린다.

두 번째, 자신의 소집단과 직접 관련되지 않으면 오불관언(吾不關焉)하는 리더다. 목사는 지역에 닥친 위기에 침묵하고 방관한다. 판단의 가닥을 잡아주길 기대하는 교인들에게 그저 살인을 금한 십계명을 거론할 뿐이다.

인명을 해칠 수 있는 교인의 의용대 참여에 대해 넌지시 반대 입장을 내비친 것이다. 손에 피를 묻혀도 그것은 교인이 아닌 보안관의 몫이란 의미다. 상황이 내포한 공동체 문제와 연결된 정의와 불의의 충돌 문제에 대해서는 끝내 입을 다문다.

세 번째, 상황과 타협함으로써 오히려 위기를 키우는 리더다. 위기 상황의 본질에 눈을 돌리는 법이 없다. 시장(市長)은 평화를 위협하는 주범으로 엉뚱하게도, 밀러가 아닌 케인을 지목한다. 밀러가 왔을 때 케인이 없으면 별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본다.

케인을 빨리 떠나보내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한다. 추격하는 일당에 잡혀 거리에서 개죽음을 당하든 그건 알 바가 아니다. 어떤 이유로든 마을 내 무력충돌 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다. 밀러 일당에 장악될 마을의 장래, 폭력적 상황의 항구화에 대한 우려는 안중에 없다.

총격전 만 피하면 북부로부터 본격 투자가 개시되어 지역 가치가 올라갈 것이라는 희망섞인 궤변까지 동원한다. 이 장밋빛‘평화경제론’에 주민들의 분분하던 입장은 하나로 정리되고 케인은 고립무원의 지경에 내몰리게 된다.

마지막으로,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던지는 리더다. 보안관 케인이다. 임기 종료를 앞두고 반나절 일찍 마을을 떠나도 무방했다. 결혼이라는 특별한 사정 또한 있지 않았는가. 다음날 부임할 새로운 보안관에게 뒷감당을 맡기면 될 일이었다. 그가 설령 밀러를 제압치 못해 마을이 과거로 회귀한다 해도 케인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케인은 임기의 마지막 순간까지 직업적인 사명을 감당하려 한다. 마을의 평화를 흔드는 본질은 밀러라 확신하기에 초두에 그를 반드시 물리치려 한다. 그일이 자신의 의무이자 명예라고 여긴다. 마을 유지들의 배신, 주민들의 외면으로 잠시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마을의 평화를 다시 지켜내기까지 케인이 싸운 상대는 밀러 일당 만이 아니었다. 더 크고 어려운 상대는 밀러 일당의 재등장을 사실상 방조하는 마을 리더들이었다.

난국이다. 내년이면 또다시 대선이다. 난국을 벗어날 기회가 될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위기가 될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다만 어떤 리더가 유력해지느냐에 따라 국운의 명암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벌써부터 대선 리더군(群)에 대한 국민 관심이 뜨거워지는 이유다.

우리는 어떤 리더를 만나왔는가?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리더가 필요한가? 영화와 달리 현실에서는 한 사람의 용기 만으로 공동체의 가치가 지켜질 수 없다. 우리는 용기있는 리더, 케인을 죽음의 벼랑 끝까지 내몰았던 이기적인 대중과 얼마나 다른지 자문해 보게 된다.


p.s. 프레드진네만 감독의 <하이눈>은 1952년 아카데미상의 주요 4개 부문을 석권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2차대전 직후 확산일로에 있던 공산주의에 대한 세태 의 순진함을 경고한 작품이라 평했다. 현재 유튜브에 영화 전편이 탑재 중.

더퍼블릭 / 김의호 더퍼블릭 논설위원 webmaster@thepub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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