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장수태왕의 평양 천도 3편 (21년 12월 17일자)

[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장수태왕의 평양 천도 3편 (21년 12월 17일자)

  • 기자명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 입력 2021.12.17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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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륙강대국 완성과 삼국통일의 거점 그리고 평양 천도 성공

·고구려는 평양천도로 정치, 외교, 군사, 경제의 강대국이 되었고, 민족통일의 완성 직전까지 갔다

▲ [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장수태왕의 평양 천도 3편 (21년 12월 17일자) (출처:유튜브)

[더퍼블릭 =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21년 12월 17일자, 장수태왕의 평양 천도 3편은 해륙강대국 완성과 삼국통일의 거점 그리고 평양 천도 성공 대한 유튜브 해설 영상의 주요 내용이다.


평양에 천도한 장수태왕의 고구려는 해륙강대국으로 발전했다. 5세기의 국제관계는 고구려, 한족의 피난 정권인 송(뒤이은 남제), 선비족인 북위, 유목 세력들이 4각축을 이루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분단된 남북조를 대상으로 동시등거리 외교를 추진하고, 다른 나라들과는 다중방사상 형태로 변모시켜 중핵조정역할을 하는 것이 국가발전에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모든 나라들은 해양으로 연결되고, 항해술과 조선술 등도 비약적으로 발달하였다. 평양지역으로 천도한 고구려는 막강한 해양력을 토대로 경기만, 요동만, 두만강 하구, 동해중부 등을 통해서 모든 나라들과 연결할 수 있었다. 439년에는 전략물자인 군마 800필을 배에 실어 양자강 하류의 송나라에 보냈고, 479년에는 화살, 석궁 등을 군사외교도 감행했다.

한편 고구려는 백제, 신라, 왜가 중국의 북조는 물론 남조와 교섭하는 것조차 해양봉쇄했다. 백제의 개로왕은 이 질서에 저항했으나 결국 475년에 고구려군 3만 명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고, 수도인 한성이 점령당했다. 고구려는 남진을 계속해 서로는 대전이 포함된 금강 이북을, 동으로는 영주, 안동, 청송, 울진, 영덕 등을 영토로 만들고 482년에는 포항 일대까지 공격했다. 이렇게 해서 대륙과 한반도의 3분의 2인 육지영토, 동해와 황해의 반 이상인 해양영토도 차지하므로써 해륙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요동지역, 압록강하구 일대, 두만강하구와 연해주남부 일대, 경기만 일대, 동해중부해안 지역 등은 황해와 동해의 항로와 물류거점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항로 물류망을 활용하여 북위, 유연, 실위, 송(제), 백제, 신라, 왜, 섭라(제주), 가야, 나아가 중앙아시아 지역 및 주변 지역과 무역을 했다.

장수왕은 평양 지역으로 천도하므로써 강대국으로 발전하고, 삼국통일을 추진하는 데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였다. 때문에 평양 지역에는 안학궁, 대성산성, 평양성 등의 수도와 궁전유적이 있고, 세계적인 평가를 받은 벽화들이 그려진 80 여기의 고분들을 비롯한 뛰어난 유물들이 많다. 또한 수도권을 둘러싼 다양한 종류의 산성과 해성들이 견고하고, 치밀한 축차방어시스템으로 구성됐다.



윤명철 교수 / ymc040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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