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조선인민군의 숨겨진 이야기

[분석]조선인민군의 숨겨진 이야기

  • 기자명 김덕환
  • 입력 2016.12.19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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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져있지 않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 이 연구내용은 북한군이 어떻게 탄생하고, 성장해왔는지를 근원적으로 연구한 결과로 기존 북한군 연구를 일부 수정하여 연재한 것입니다. 필자는 군과 국회의뢰로 북한에 대한 연구(국회 정책연구 수행)를 해왔으며, 다양한 관련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오류가 있음을 인정하고, 대한민국의 법률을 준수하였음을 밝히는 바입니다.



‘ 내가 비록, 탱크로 남한을 점령(조국통일) 하지는 못했지만,


50년후에는 남한 스스로 자체분열하게 만들 것이다. ’


- 김일성 1950년대 미확인 연설 중에서(추정)



1. 만주와 북한


A. 만주와 북한


한국과 북한의 근현대사는 모두 만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박정희, 정일권, 백선엽, 백인엽과 북한의 김일성과 최용건, 김책, 오진우 등 모두 같은 시기 만주에 있었고, 이들은 해방후 한국과 북한의 주요한 정치 군사지도자가 되었다.


1930~1940년대 만주는 항일세력과 망명자, 일본, 국민당, 중국공산당, 소련의 스파이 등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했다. 특히, 당시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만주는 기회의 땅으로 여겨져 많은 조선인들이 이주하였다. 1930년대 만주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받던 상황이었고, 이러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중국인과 조선인, 만주인 등이 연합한 항일부대가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항일부대를 동북항일연군이라고 불렸다. 동북항일연군은 여러 민족으로 결성된 연합부대였으나 실제 병력은 가장 많았던 시기에도 15000여명 수준에 불과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의 지휘부는 주로 중국공산당원들이었으나 많은 조선인들이 참여 했고, 그 대표적인 인물은 김일성과 최용건 등이었다.


젊은 시절의 김일성









젊은 시절의 최용건










B. 김일성과 보천보전투


김일성은 민족주의적 성향과 공산주의적 성향을 다 같이 지닌 인물로 소년시절부터 항일의식을 가지고 항일게릴라활동에 참가하였다. 김일성은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민족주의계열의 항일부대로 찾아갔으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중국공산당계열의 항일무장부대에 참가하였다. 이 항일무장부대는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되었고, 후일,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2군 6사(한국의 보병중대 규모)의 지휘관이 되었다. 김일성부대가 국내에 주목받았던 것은 1937년 6월 함경도 보천보를 기습공격하여 점령한 이른바 '보천보 전투'라고 불리는 전투였다.


이 보천보 전투는 한국과 북한간의 관점이 너무나 상이하고 한국내에서도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보천보 전투는 군사적으로는 대전과가 아니라고 볼 수 있었으나 정치적으로는 매우 큰 사건이었다. 당시, 보천보전투는 약 90여명의 2군 6사(지휘관 김일성)이 국내 항일조직이었던 갑산파의 지원속에 보천보를 수시간 점령하여 일본군과 일본경찰이 아닌 민간인 2명을 사살하고 선전공작과 군자금확보를 한 후 철수한 사건이었다.


비록, 이 전투의 전과자체는 보잘 것 없었으나 당시, 만주지역에 조선인 항일부대가 전멸했거나 중국 내륙지방으로 이동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시기에 아직 무장부대가 있었던 것 자체가 조선인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으며 당시, 일본입장에서도 내지(內地)라고 생각되던 조선반도에 항일부대의 공격은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에, 일본은 김일성에 막대한 현상금을 걸고 김일성부대를 잡기위한 전문적인 추적부대까지 운영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이 항복자는 귀순자로 처리하고 생명보장은 물론, 토지를 나누어주는 일본군의 귀순공작에 많은 항복자와 배신자가 나타나 동북항일연군은 결국 지도자인 양정우가 사망하고 부대가 와해되어 버린다. 이러던 상황에서 김일성부대는 일본 추적부대의 집요한 추적을 받게되는데, 1938년 12월에서 1939년 3월까지 약 백여일간 눈덮힌 산속을 가로지르며 토벌부대의 추적을 결국 따돌리게 되는데, 후일, 북한은 이를 고난의 행군 시기라고 불렀다.



* 북한 정부는 1990년대 초반부터 급속히 악화된 경제상황을 다시 고난의 행군시기라고 표현하고 1930년대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린 그때처럼, 결국 이 시기를 지나면 쌀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1937년 6월 5일 동아일보 호외- 보천보전투 보도












보천보전투 보도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일성부대는 1940년 흥기와지역의 목재소를 기습공격하고 퇴각하던 중, 일본 추적부대의 집요한 추적을 받게 되었다. 당시, 일본 추적부대의 지휘관은 마에다 다게이찌 경정으로 항상 김일성의 머리를 베겠다고 외치던 이였다. 김일성부대는 이러한 추적부대를 따돌리지 못하였으나, 항복을 거부하고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게 되었고, 일본 추적부대는 김일성부대의 포위망에 걸려 부대원 대대수(120여명)가 사살당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일본 추적부대의 구성원 상당수가 조선계 경찰이었다. 김일성부대측에서 포위당한 일본 부대에 생명보장을 약속하고 항복을 권하였으나 조선계 경찰중에서 아무도 항복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측 현충비에는 이러한 조선계 경찰중에 끝까지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며 장렬히 전사했다고 적혀있는바 1930년대 후반 당시, 일본의 조선지배가 얼마나 견고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1940년 김일성부대는 일본의 추적망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소련으로 망명하였고, 이시기 망명한 약 200여명의 부대원들과 그 가족들이 후일, 북한정권을 장악하고 이끄는 이른바 빨치산파로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빨치산파는 고난의 행군시기를 거치며 매우 강한 결속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러한 결속력은 그들이 해방이후, 다른 파벌에 비하여 매우 소수였으나 강한 결속을 가지고 북한정권을 수립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2. 북한군의 모체 : 동북항일연군과 88특별저격여단



김일성은 “우리 인민군은 독립을 목표로 한 인민들의 오랫동안의 투쟁경험뿐만 아니라, 우리의 동지이자 세계혁명운동 및 노동운동의 돌격대인 소비에트 군대의 풍부한 전투경험을 부단히 받아들이고 있다.’ 라고 하며 북한군의 특성을 규정하였다. 즉, ‘오랜 동안의 투쟁경험’은 일본 관동군과 만주군에 대항한 동북항일연군의 활동을 의미하고, ‘소비에트군대의 풍부한 전투경험을 부단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소련군에서의 전투학습을 의미한다.



A. 약자의 전술(빨치산파) : 동북항일연군



위에서 언급했듯이 동북항일연군은 당시, 만주지역에 있던 한족, 조선족, 몽골족 등의 항일연합부대로 일본군이 장비 및 훈련의 우수성만을 믿고 산악 및 삼림지역과 특수지역에서의 전투와 트럭으로 이동할 때, 전술적인 취약점이 있다는 것을 포착, 병력을 집중 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이러한 전술의 근원은 빨치산(Partizan 유격대)전술이었다. 이러한 전술의 형태중 대표적인 것은 빨치산전투요령에 잘 나타나 있다.



빨치산 전투요령



1. 단호한 공격정신


2. 상대방의 약점 공격


3. 은밀한 준비와 민첩한 행동


* 상기원칙을 지방주민과 밀접한 연계하에 실시




이러한 빨치산전술에 입각한 동북항일연군의 활동은 상당히 고무적이었는데, 실제, 만주일대에서 상당한 전과를 얻게 되었다. 동북항일연군의 활동에 일본 관동군은 초토화 작전인 삼광작전을 개시하였는데, 삼광작전은 게릴라의 보급기지 역할을 했던 민간인 마을을 죽이고 빼앗고 불태우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이러한 작전에 동북항일연군은 큰 타격을 입고, 결정적으로 일제는 1937년 ‘은사(恩赦)의 대조’를 내놓아 항복한자를 처형하지 않고 귀순자로 대우한다는 전술을 채택하는 귀순공작이 실시되었고, 길림 제2군관구 사령부 예하의 간도특설대가 조직되어 항일연군을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토벌과 귀순공작으로 투항자들이 속출하고 이들이 다시 일본군과 만주군의 길잡이가 되어 추격을 하는 등 항일연군은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결국, 동북항일연군에 많은 귀순자와 배신자들이 나왔으며 지도자인 양정우마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지휘관인 주보중(김일성의 상관, 중국인)이 먼저 소련으로 망명하고, 김일성과 소수의 살아남은 부대원 역시 1940년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비록, 동북항일연군이 오랜 기간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동북항일연군을 통해 김일성부대는 철저하게 약자의 전술인 빨치산전술을 체득했다고 판단된다.


이 름


당 시 직 책


후일 직책


비 고


최용건


동북항일연군 제7군장


민족보위상


(1948-1957) 등



김 책


제3군 정치위원


전선사령관(1950), 부수상


전사


김일성


제2군 6사장


최고사령관


(1950~), 수상


사망


최 현


제2군 5사장


민족보위상


(1968-1976)



안 길


제2군 14단 정치위원


총참모장


(1946-1947)



강 건


제5군 정치위원


총참모장


(1947-1950)



오진우


김일성부대원(추정)


인민무력부장



[ 동북항일연군 시절 , 주요 조선인 직책]


* 기존 연구 참조



B. 강자의 전술(빨치산파) : 88특별저격여단



1940년, 일본군의 게릴라섬멸작전으로 동북항일연군은 거의 와해되었고, 살아남은 항일부대는 소련으로 망명하거나 중국내륙으로 철수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정치지도자이자 김일성의 상관인 중국인 주보중이 소련으로 망명후, 김일성은 소수의 부대원을 이끌고 소련으로 망명한다. 김일성은 처음 소련군에 의해 구금되었으나 김일성을 알아본 주보중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나고 소련군으로부터 정식 군사교육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소련 극동군은 향후에 있을 대일전을 준비하고자 동북항일연군의 중국인과 조선인을 활용하고자 하였는데, 이들을 주로 대상으로 한 88특별저격여단이 1942년 재편성되어 소련군의 교육을 받았다. 이들 소련 군사교육의 경험자들은 북한군 지휘부 및 참모부서, 각 사단의 주요 직책으로 북한군의 중추를 이루었다. 이들은 약자의 전법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강자로서의 공세적 전법을 습득, 도입하였다. 1938년 소련군은 구일본군과 노몬한, 장고봉에서 대규모 정규전(전차포함)을 펼쳐 일본군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 일소 불가침조약을 맺게 한 전력이 있었다. 즉, 소련군은 일본군에 대해 강자 였으며, 이러한 소련군의 전술을 배운 북한군은 약자와 강자의 두가지 측면을 절충시킨 전법을 내면시켰다고 볼 수 있다.



88특별저격여단




이 름


당 시 직 책


후일 직책


비 고


최용건


여단 정치위원


민족보위상



김 책


대대 정치위원


전선사령관


전 사


김일성


대대장


최고사령관



강 건


대대장


총참모장



안 길


대대정치위원


총참모장



김 일


중대장


문화(정치)훈련국장



김광협


중대장


민족보위상


(1957-1962)


한국전당시, 2군단장


최 현


중대장


민족보위상


(1958-1960)



최용진


중대장


군단장(1950)



최 광


소대장


총참모장


(1963-1969)



류경수


소대장


군단장(1950)


류경수 105군부대


한국전당시,


서울 점령


허봉학


소대장


총정치국장


(1960-1967, 8)


1968년경 숙청


[ 88특별저격여단 시절, 주요 조선인 직책]




■ 소견 : 소련군과 독일군의 군사교류



소련과 독일간의 비밀군사교류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20년대중후반부터 소련군과 독일군은 비밀리에 군사교류를 하게 되었는데, 1919년 베르사유조약으로 대규모 군전력 및 전술 연구가 제한된 독일군과 세계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으로 서방의 군사지원을 차단당한 소련군은 양자의 필요에 의해 서로 전술 및 합동 군사연구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에서 나온 결과물이 2차대전에서 독일군에 의해 전격전형태로 나오게 되었으나, 소련의 경우, 이러한 새로운 전술을 집대성한 군사지휘관이었던 1937년 투하체프스키 원수가 스탈린에 의해 숙청당하고, 독일군과 합동군사 연구를 했던 소련군 장교들이 대다수 해임되거나 강제수용소로 향함으로써, 소련군은 점차 스탈린에 충성하는 정치장교들이 군을 장악하고 군의 전투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인해 1940년 독일의 소련침공 당시, 소련군은 무기력하게 독일에게 영토를 내어주게 된 것이었다. 즉, 독일의 전격전, 마비, 전차 등의 전략과 전술개념은 이미 소련군에게도 있었으며, 소련군은 늦게나마 전쟁을 통해 다시한번 그들 나름의 전술을 부활시키게 되었고, 독일군을 격퇴하였던 것이다.



투하체프스키


88특별저격여단의 활동 : 주로 정보수집



1941년에서 1945년까지 88특별저격여단의 임무는 주로 정보수집활동에 집중되었다. 조선인과 중국인 부대원들은 일본 관동군 후방의 지리에 밝았고, 몇몇은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실제 일본군과 만주군등과 전투한 경험이 있었기에 소련 극동군의 입장에서는 이들은 매우 유용한 존재였다. 이들 빨치산파들은 기존 항일부대로서의 활동보다는 소련군의 정보부대 역할이 더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국내에 대한 활동을 완전히 소홀히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등 빨치산은 독자적으로 국내에서 활동하였던 오진우 등과 연결되어 있었고, 이들과 연계된 항일세력은 평양비행장까지 촬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한 후, 88특별저격여단의 대다수 조선인은 북한으로 돌아갔고, 그들은 소수였으나 아주 강인한 전사가 되어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30대초반으로 북한으로 돌아가기 까지 이미 10년이상의 게릴라 전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1990년대 중반까지 북한군 지휘부의 상당수를 차지하였다.



[더퍼블릭 = 김덕환 기자]



더퍼블릭 / 김덕환 yan1945081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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