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조선인민군의 숨겨진 이야기(3)

[분석]조선인민군의 숨겨진 이야기(3)

  • 기자명 김덕환
  • 입력 2017.01.2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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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번째 이야기

- 조선인민군의 세번째 이야기


CHAPTER 2 한국전쟁


1. 남침 작전 개시


A .남침작전 계획의 특징


한국전쟁의 특징은 북한군이 월등한 군사력으로 완벽에 가까운 기습공격으로 조기 승리하는 것이다. 북한군은 이러한 공격계획을 위해 준비해왔고, 자신감도 있었다. 다만, 전제가 되는 것은 미 지상군이 참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전쟁이 발발하면 미군의 해공군 지원은 있겠지만, 분격적인 지상군 참전은 없을 것이라 보았고, 만약, 만에 하나라도 미 지상군 참전이 결정되더라도 이미 북한군의 전쟁승리가 확실시되어 미군이 전쟁에서 개입할 수 없으리라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민족보위상 최용건은 전쟁이 발발하면 미군이 참전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북한군 지휘부는 전쟁을 결정하였고, 작전개시 시간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이었다.


B. 북한군의 작전계획 : 8. 15일안에 종전을 목표로


작전계획에 대해 북한측 전사에서는 한미 연합군의 공격에 대해 “완강한 방어전으로 한국군의 공격을 저지한 후, 반격작전으로 전환 서울지역에서 한국군의 주력을 포위 섬멸하고, 전과를 확대 남해안에 진출한다.”라고 기술함으로써 서울지역에서 한국군을 포위 섬멸하려고 기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 북한은 한국군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발발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한국측 ‘한국전쟁사’에 의하면 북한군의 공격계획은 남한을 50일내에 완전히 점령하는 것으로 속전속결의 단기전으로 종결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을 하였다라고 서술하였다.


남과 북의 입장이 다르기는 하지만, 아마도 북한군의 공격계획은 대규모 포병공격후, 전차를 앞세운 기동전으로 한국군의 주력을 전쟁초기에 포착, 섬멸하고 빠른 속도로 남한지역 전체를 석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북한군이 한국군의 주력을 포착하여 섬멸하려고 했던 곳은 수원으로 생각된다. 한국 육군대학의 ‘한국전쟁사’에 게재된 러시아로 된 북한군의 선제공격계획을 보면 북한군의 공격계획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즉, 북한군은 주력을 인민군 1군단으로, 조공을 인민군 2군단으로 설정하고, 주력인 1군단이 서울의 정면인 개성과 동두천, 의정부 일대를 공격하고, 조공인 2군단이 강원도 전선을 담당, 춘천을 거쳐 우회기동하여 수도권남부에서 한국군 주력을 차단, 1군단과 2군단이 한국군 주력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것이 북한군 공격계획 핵심인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자료 재인용 : [한국전당시, 북한군의 남침작전 핵심요도]

C . 전쟁의 개시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은 발발하였다. 북한군은 대규모 포병사격후, 전차를 앞세워 남침해왔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군은 북한군의 침공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시, 육본 정보문건을 보면, 1950년 6월 25일, 26일 북한군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정보보고를 하였으나 당시, 군책임자 채병덕장군은 이를 무시하였다. 특이할 점은 육본의 정보문건 보고자 중 한명은 후일 한국의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도 있었다. 북한군은 전전선에서 한국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한국군은 빠른 속도로 패퇴하였다. 서부전선에 육본은 의정부에 수도방위를 위한 최후의 방어선을 펼쳐 북한군을 막을 것을 계획하였으나, 육사생도대등를 포함한 27개대대를 나누어투입, 전력을 분산운용함으로 북한군의 공격을 막지못했다.


당시, 북한군은 주공인 1군단이 서부전선을, 조공이 2군단이 동부전선을 돌파해 수원 등 경기남부에서 한국군을 포위섬멸하는 것을 작전계획하고 있었다.


북한 1군단의 공격은 매우 순조로왔다. 의정부에서 한국군을 격퇴한 북한군은 서울을 향한 대공세를 펼쳤으나 서울에서 한국군 1사단(사단장 대령 백선엽)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다. 그러나, 한국군 1사단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이미 승패는 결정되어있었다. 의정부방어선 붕괴에 위협을 느낀 한국군 지휘부는 6월 28일 새벽 02시,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였다. 이로인해, 한국군의 재집결을 엄호하던 한국군 1사단의 퇴로가 차단당해 사기가 저하되었고, 방어선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붕괴되었다. 그러나, 한강 인도교 조기폭파는 한국군 예비부대의 한강이북진출을 불가능하게 한 반면, 북한군이 한국군의 주력을 포착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한 주요인이 되었다. 한강 인도교 조기 폭파과정에서 상당한 수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하였고, 조기폭파의 책임을 두고 당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 처형당하였으나 아이러니하게 한국군 반격의 계기가 되는 상황으로 연결된다. (세부설명은 뒤에)


* 최창식대령은 1950년 9월 ,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후 복권되었다.


동부전선의 2군단은 예상외의 복병을 만나게 되는데, 후일, ‘춘천의 바위’라고 평가되는 한국군 6사단(사단장 대령 김종오)이다. 당시, 한국군 6사단장은 망명자와 정보보고등을 근거로 한 정보판단을 통해, 북한군의 침공이 임박했음을 인식, 부대를 출동대기태세를 유지, 전투력을 유지하였고, 남침시, 북한군(주로 인민군 2사단)의 공격을 매우 효과적으로 방어하였다. 이에, 북한 2군단장 김광협은 전직 작전부장(한국의 작전참모)출신으로 남침작전시, 북한 2군단의 역할을 정확히 이해하였기에 전차와 북한군 7사단을 추가투입하여 한국군 6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국군 6사단은 준비된 진지와 6사단 부대원들의 전투정신으로 거의 모든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이에, 김광협은 군단장직위에서 군단 참모장으로 좌천되었고, 7사단장 전우는 해임되었다. 한국군 6사단은 춘천을 방어하였으나 서부전선의 붕괴속도가 너무 빨라 측면공격이 우려되어 부득이 철수하였다. 이러한 춘천대첩의 결과, 북한군의 남침계획은 조금씩 틀어지게 되었다.



[ 한국전 초기 북한군 ]

당시, 북한군 1군단은 서울을 점령하고, 승리축하연까지 열었다. 한강다리를 복구하지 않은채 2군단을 기다렸으나 2군단은 오지 않았다. 북한 1군단은 6월 28~30일 정지해 있었고, 인도교를 복구하느라 7월 1일과 2일 총 5일을 헛되이 씀으로써 한국군 주력이 재집결하여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 6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후일, 참모총장이 되는 정일권장군은 이러한 북한군의 움직임은 한국군입장에서는 매우 다행스러운 것으로 평가하였고, 이는 2차대전중인 1940년 독일군이 패퇴한 영국과 프랑스군의 잔여병력 35만명을 덩커르크에서 포위하였으나 정지하여 영국으로 탈출, 후일, 대반격의 발판이 되었던 덩커르크철수와 비견되는 사건이라는 평가가 있다.


북한군의 침공으로 미국정부는 맥아더에게 참전여부를 위한 정세분석을 의뢰하였고, 맥아더는 수원비행장에 도착하여 당시, 참모총장 채병덕장군에게 작전계획에 대해 질문하였으나 채병덕장군은 답변하지 못했다. 또한, 당시, 한국군 지휘부의 무질서한 행동을 보고, 맹비난하였으나, 수원비행장의 이등병일화와 북한군을 피해 남하하는 피난민을 보고, 아직, 민심이 북한보다는 한국에 있고, 일반 병사들의 전투의지가 살아있음을 보고, 워싱턴에 지상군 파병을 건의하였다.


- 수원비행장 이등병 일화 :


수원비행장에서 맥아더장군은 경계근무중이었던 한국군 이병에게 임무를 물었고, 이병은 자신은 지휘관의 명령없이는 절대, 진지를 이탈하지 않겠다고 말했고, 이병은 북한군을 격퇴할 수 있는 지원군과 무기를 달라고 맥아더 장군에게 요청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보좌관에게 그 친구에게 지원병을 이끌고 올테니 그때까지 버텨달라고 주문하였다. 후일, 신성모 국방장관은 수원비행장의 이 무명병사가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군에 대한 큰 인상을 남겼다고 평하였다. 이 무명병사는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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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미군은 한국에 대규모 참전을 결정, 처음, 스미스특별임무대대(Task Force Smith)를 파견하여 북한군의 전력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스미스대대는 사실, 북한군의 공격능력을 구일본군의 수준으로 파악하고, 오산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D. 북한군과 미군의 최초 전투 : 오산 전투


사실, 북한군은 세계 최강의 미군과 싸우게 될지 예상하지 못한채, 미군과 조우하게 되었지만, 전쟁 초기 미군을 철저히 격파하였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3, 4사단 및 105전차여단(T-34 150대)은 서울-부산 국도를 따라 파죽지세로 남하하였다. 이에 북한군의 전력파악과 지연작전을 임무로 한 스미스특별임무대대는 105MM 곡사포 6문의 지원을 받으며 방어진지를 구축했고, 스미스부대원들은 승리를 낙관하였다.


그러나, 7월 5일 북한군 107전차연대(T-34 33대)는 스미스대대를 공격, 공격개시 한시간만에 방어진지를 돌파하였다. 이후, 인민군 보병 2개연대가 포위를 시작하였고, 스미스부대는 격렬히 저항하였으나, 전투시작, 6시간만에 후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전차를 이용해 중앙돌파를 하고, 보병은 화력(포병)지원하에 배후에서 포위하는 유럽식 정형(定型)전법을 사용하였다. 미군은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아시아에서 유럽군대와 전투하게 되었다. 이 전투결과, 미군의 대전차무기(60MM 무반동총)은 북한의 T-34전차를 격파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고, 이는 한미양국군의 사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북한군의 전법은 평택, 오산에서 대전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다.


또한, 대전지역을 방어하던 미 24사단 역시, 17일간 사단장 딘소장이 직접 무반동총을 북한군 전차에 발사하며 격렬히 저항하였지만, 사단장을 포함한 7,300여명의 병력과 장비의 60%를 상실하였고, 딘소장은 생포되어 북한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딘 소장 ]


[ 1950년 7월 13일 전황지도 ]


E. 북한 인민군 6사단 : 전설의 6사단


북한 인민군 6사단은 중공군 166사단(조선인부대)을 근간으로 하며, 이들은 오랜세월 중국전선에서 일본군과 국민당군과 싸워온 경험이 있었다. 특히, 사단장 방호산은 전설적인 중공군 129사단의 전술을 익혀 활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6사단은 소련계 사단이 대규모 포격후, 전차를 앞세운 정형전법을 활용한 것에 비해, 산악 · 야간침투등 신출기몰하고 기묘한 전술을 활용하였다. 사단장 방호산은 1950년 6월 25일 개성을 공격하는데 있어 끊겨진 경의선철도를 은밀히 복구하여 1개 연대를 이동시켜, 한국군 배후(개성 후방)에 진입하여 한국군을 공격, 개성을 손쉽게 점령하였다.


7월초, 한강을 도하한 북한군 6사단은 서해안을 따라 은밀히 남하하고 있었다. 당시, 미군은 인민군 6사단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파악하지 못하였다. 미군은 당시, 주로 항공정찰을 이용했는데, 악천후로 인해 정찰을 제대로 실시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로인해, 7월 11일부터 인민군 6사단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였는데, 7월 23일 전주방향에서 인민군 6사단의 일부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당시, 미군은 이 부대를 막을 부대를 가지지 못하였다. 인민군 6사단은 빠르게 남하하였고, 미군측은 이 부대가 전라도로 진출, 마산을 거쳐 부산으로 이동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인민군 6사단은 7월 23일 광주를 점령한 후, 즉시 순천 - 진주방향으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그래야만 낙동강방어선이 견고히 구축되기전에 진주 , 마산을 거쳐 부산에 일격을 가해 한미 연합군의 숨통을 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민군 6사단은 보급없이 작전하였기에 7월 23일부터 7월 24일까지 목포와 여수에서 해상보급을 받아야 했으므로 부대가 정지(부대재정비)하게 되었다. 더욱이 미군의 서해안 기습상륙을 견제하고자 목포, 보성, 여수 등의 항구에 3개연대를 보내 장악하여 시간을 소모할 수 밖에 없었다.


사단장 방호산은 오랜 전투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신속한 기동과 공격타이밍에 대한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재보급이 끝난 7월 25일 순천에서 재집결하여 출발전, 부대원들에게 진주, 마산을 해방하고 한국군의 숨통을 끊어 전쟁을 끝내기 위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연설하며 작전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한국전 당시, 인민군 6사단과 방호산의 행적은 남북한 당사자보다 미군과 미국 언론이 더욱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군은 당시, 6사단의 기동을 한국전당시, 성공적인 기동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미국 언론과 일부 미국 학자들은 6사단과 방호산에 대한 매우 인상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인민군 6사단이 2일간 재보급으로 정지해있던 동안, 미군은 미 24사단의 잔존부대를 급히 차출하여 진주로 이동시키고, 워커(당시 중장)장군은 작전지휘중 가장 큰 결단이라고 부르는 미 25사단의 진주지역, 긴급 투입을 성공시켜 6사단의 진격을 차단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진주와 마산의 위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미군은 한국군와 영국, 호주 등의 연합군과 함께 낙동강 방어선 사수에 모든 역량을 기울일 수 있었다.


인민군 6사단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1개사단으로 전라도를 석권하고, 진주를 거쳐 부산을 위협하였다. 그들은 다른 빨치산 사단장부대와는 달리, 중국에서 익힌 독자적인 전술을 시도하고 성공하였다. 또한, 전(前) 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이 전선시찰중 인민군 6사단의 정찰·매복 부대에 사살당하여 그들 나름대로의 전과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특히, 인민군 6사단은 인천상륙작전이후, 매우 흥미로운 행동을 하게 된다. 인천상륙작전이후, 퇴각로를 차단당한 북한군은 일종의 패닉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인민군 6사단은 중국전선에서 포위와 퇴각을 수차례 겪어보았기에 공황상태에 빠지지 않고, 북한정부에 충성하는 사람들(수천명에 달한다는 설이 있음)을 퇴로가 차단당한 상황에서 다른 빨치산계 사단과는 달리 산맥을 통해 도보이동하여 북한으로 탈출하였다. 그동안, 한미 연합군은 인민군 6사단의 퇴로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고, 인민군 6사단은 월북하여 소위 ‘전설의 6사단’ 신화를 만든다.


또한, 사단장 방호산은 후일, 한국군 창군이래, 가장 치욕스러운 패배로 평가되는 현리전투(한국군 3군단의 완벽한 패배)를 기획하였고, 연안파임에도 불구하고, 공화국 이중영웅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2. 인천상륙작전 : 반격의 서막


A. 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급속한 붕괴 - 북한군은 알고 있었다.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미군 작전명 : 크로마이트)에 대한 정보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비록, UN군이 군산과 동해 지역에 양동작전을 게시하여 북한 지휘부에게 공격지점에 대한 혼란을 주려고 하였으나, 북한 정보기관은 부산에서 준비되는 상륙군의 움직임과 정보수집을 통해 평양에 공격지점이 인천임을 정보보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김일성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최용건을 서해안 방어사령관으로 임명하였지만, 낙동강 전선에 모든 전투력을 집중하였다.



김일성은 인천상륙에 대한 방비보다는 모든 전력을 부산을 하루빨리 함락시키는 것이 전쟁을 종결시키는 좀 더 현실적으로 판단한 것으로 생각된다. 최용건 역시, 이러한 김일성의 견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인천-서울지역에 배치되어있던 신설 인민군 18사단을 미군이 상륙준비를 하던 시기, 천안을 거쳐 낙동강전선으로 남하시켰다. 최용건은 약 3000여명의 인민군(추정)을 가지고,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을 방어하였는데, 그 역시, 낙동강 전선만 돌파한다면 전쟁은 끝낼수 있다고 확신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최용건은 수만명에 달하는 한국에서 강제 징집된 한국출신 인민군과 의용지원대를 믿지 않았고, 소수지만, 가장 전투력이 왕성한 부대는 역시, 북한출신의 인민군이었고, 이들을 믿고, 모든 역량을 낙동강으로 투입한 것으로 보인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은 개시되었다. 한국 해군정보부대의 비밀작전(작전명 : X)에 의해 상륙부대는 인천 해안지역의 북한군을 초토화시키고, UN군은 인천지역에서의 북한군의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비록, 일부, 일부 북한군의 격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대다수는 소극적인 저항으로 UN군은 서울을 향하였고, 점령하였다. 특이한 점은 당서, 서울 중앙청을 최초, 점령할 수 있는 부대는 한국군 해병대가 아니라 미 해병대라는 견해가 있다. 미 해병대는 매우 빠른 속도로 서울 중앙청을 향해 진격했으나 정치적 이유로 중앙청을 점령하는 것은 한국 해병대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당시, 미군은 전쟁개입의 정당성과 한국인들에게 자신감을 주고자, 의도적으로 한국 해병대에게 중앙청의 점령을 맡기었다. 미 해병대 보다 수시간 늦게 도착한 한국 해병대는 북한군의 저항을 격퇴하고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린다. 현장에 있었던 당시, 미 해병대원은 전후, 중앙청 점령은 자신들의 공이었으며, 한국 해병대가 이 전과를 가져갔다고 서운함을 미국 언론에 토로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압도적 유엔군의 화력으로 결국, 성공하였는데, 이는 북한군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퇴로가 차단당한 군대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 공황상태로 철저히 와해되거나 오히려, 전투의지를 가지고 저항하게 된다. 대다수의 북한군은 와해되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부대붕괴속도는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낙동강전선에서 전투하던 부대들은 생존을 향해 전선을 포기하고 북으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젊은 지휘관들의 부대들은 그 정도가 심하였다. 이는 북한군 지휘부가 짧은 정규전 경험을 가지고 있고, 부대원들의 정치교육이 미흡한 결과였다.



김일성은 이미, 이러한 사태를 우려해 1950년 8월 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제81호에 모든 지휘관에게 진지이탈을 금지시켰다.



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제81호


1. 모든 부대와 부대장은 명령을 받은 지역과 자기진지로부터 일보도


물러날 수 없다.


2. 모든 비겁한 자와 전장으로부터 도주하려는 자는 지위를 불문하고


현장에서 총살한다.


- 일부 편집




전쟁이 장기화되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북한군의 사기가 저하되는 것은 이해하나 최고사령관 명령으로 지휘관의 진지이탈을 금지할 정도였으면, 당시, 북한군 부대군기가 얼마나 해이했는지 잘 파악할 수 있다.



이에, 10월 중공군 출신, 2군단장 무정은 허락없이 부상병을 내버려둔채, 임무지역을 벗어나려는 군의무부장(한국의 고위급 군의관)을 현장에서 즉결처형한다.


중공군출신으로 한국전 당시는 북한군이었으나 전후, 중국으로 망명, 한국에 협조적인 한 익명의 북한군 정치장교는 특히, 소련(빨치산)계 부대의 붕괴속도가 빨랐다고 증언하고, 빨치산 출신을 무능력하다고 비난하였다. 반면, 오랜세월 철저히 약자의 입장에서 일본군과 국민당군과 싸워왔던 중공계 사단은 고립된 상황에서 나름 질서정연하게 퇴각을 시도하였다. 중공계 사단들에게는 포위당하는 것을 이미, 중국에서 수차례 겪었기 때문에 심리적 공황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인민군6사단(중공군 출신)은 퇴로가 차단당한 상황에서도 산맥을 이용해 북한으로 탈출하였다.



B. 전쟁의 변화 : 중공군의 참전


임진왜란의 교훈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조선을 공격했을때, 일본의 조선침공을 명정부는 조선의 정보보고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당시, 명정부는 조선이 일본과 협력하여 명을 공격하지 않을까 의심하였다. 명정부는 이백년전, 조선의 태조가 만주를 공격하기위해 군대를 준비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일본의 침공가능성이 공공연한 소문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사전에 어떠한 정보보고를 하지 않은 점, 조선군 주력이 10여일만에 대패하여 수도인 한양을 잃은 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조선의 원병지원 요청전에 이미, 명의 정예 부대를 조선으로 파병하였다. 파병군의 목적은 조선의 전황을 파악하고, 조선정부가 일본과 협력하는 것이 맞다면 조선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한국전당시,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을 당시, 미국 정부는 38선을 넘는 것에 매우 회의적이었다. 만약, 미군등 UN군이 한국전에 참전한 것은 한국내에서 북한군을 축출하는 것이었고, 그 목적은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달성되었다. 또한, 38선을 넘어 진격을 개시하면 소련, 중공을 자극할까 두려워하였는데, 당시, 한국 이승만대통령은 한국군에게 38선을 넘어 북진하라고 명령하였고, 한국군은 북진해서 전선을 확대시켰다. 인천상륙작전으로 강제징집병으로 포함한 12만명의 북한군이 투항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북한군의 지휘라인은 붕괴된 것으로 보였으며, 이제 북진통일의 가능성은 실현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북진에 대해 중국 공산당정부는 이를 매우 위협적인 행동으로 생각하였다. 당시, 중국 모택동은 북한지역에 친미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북한지역에 파병을 검토한다. 당시, 중국인민해방군 지휘관들은 대만점령이 급선무라며, 한국전참전에 반대하였으나 모택동은 만주지역 사령관에게 동지를 구할 준비를 하라며 비밀전문을 보내고, 얼마후, 팽덕희의 항미원조군이 북한에 파병된다. 중국에게는 북한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위한 주권선이었다. 팽덕희가 지휘하는 80여만의 중국 의용군(항미원조지원군 抗美援朝支援軍)이 한국전쟁에 가담함으로 전쟁은 더욱 격렬해 졌다.


[팽덕회와 김일성]


이후, 전쟁은 어느 한 진영의 절대적인 우세를 허락하지 않고 장기전에 들어서게 되었다.



1951년 소련의 말라크가 휴전을 제의하고, 양측은 2년간의 휴전협상을 통해 1953년 7월 27일 휴전에 들어서게 된다. 공식적으로 한국 정부는 이러한 휴전에 동의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고, 북한 정부는 이것을 근거로 한국정부가 휴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며 미국과의 협상만을 추구하는 ‘통미봉남’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계속)


[더퍼블릭 = 김덕환 기자]


더퍼블릭 / 김덕환 yan1945081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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