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조선인민군의 숨겨진 이야기(5)

[분석] 조선인민군의 숨겨진 이야기(5)

  • 기자명 김덕환
  • 입력 2017.02.21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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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번째 이야기

- 조선인민군의 다섯번째 이야기



4대 군사노선


북한군이 한국전에서 얻은 교훈으로 얻은 경험으로 채택한 4대 군사노선은 다음과 같다.



A. 전군의 간부화



북한군은 기본적으로 세계최강의 미군과 싸우게 될 줄 예상하지 못한 채, 전쟁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미군의 개입으로 북한군은 세계최강의 군대와 싸웠고, 초전에서는 미군을 상대로 화력의 우위를 점하고, 미군을 철저히 격파하였다. 그러나, 미군은 전력을 재정비, 공중공격, 포병등 화력지원과 대규모의 물량공세로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사실상, 전쟁목적 달성에 실패한 북한군은 중공군의 지원으로 기사회생하긴 했고, 이러한 경험은 북한군의 운영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북한군은 한국전쟁기간동안, 젊은 장교들로 운영되어 장기간의 전투경험이 없었다. 또한, 미군의 대규모 공격에 북한군과 중공군의 지휘관들과 핵심인물들이 사망하면서 전투중 지휘관을 잃은채, 한미 연합군에 각개격파당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북한군지휘체계를 북한군 실정에 맞도록 유도하게 되었는데, 북한군은 전군의 간부화를 통해 현역 장병의 지휘 및 지도능력을 향상시키고, 유사시 방대한 보충병력의 지휘자 및 지도자 소요를 충당하기 위한 것이다.


즉, 인민군 소좌는 중좌의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고, 전사는 상급전사의 능력을 배양하도록 한것이다.


또한, 이것은 간부의식을 심어주어 일반전사들의 사상적 해이를 막는 역할을


해줄 것이다.



B. 전군의 현대화


북한군은 압도적인 미군의 공중공격과 당시 최첨단 무기들의 공격을 경험하였다. 또한, 북한군은 제1의 적을 한국군이 아닌 미군으로 설정해두었기에 미군에 대응할 전력을 준비하고자 하였는데, 현실적으로 북한군이 미군의 무기체계를 이겨낼 가능성은 없다.


그럼으로, 미군의 공격을 격퇴할 무기체계에 개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고사포, 대공미사일등 방공무기를 집중개발 하였는데, 북한군은 2008년 현재, 한국군대비 고사포수는 15배, 미사일은 6배의 이상 격차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한국전의 경험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해당수치는 추정치임.)



또한, 1960년대, 중소관계가 악화된 후, 북한군은 무기산업 개발에 큰 치중을 하게되었는데, 1970년대이후, 무기를 자체생산하였으며, 독자적인 무기들을 생산하였는데, 북한제 무기는 가격대 성능에서 미국의 적대국(이란, 시리아, 카다피 집권당시의 리비아 등)에게 매우 인기가 좋다. 실제로 2009년 북한은 중동의 모국에 RPG(척탄수류탄발사기 : 로켓발사기)와 대공화기, 중화기 등을 제3국인 태국을 거쳐 판매하려다 미국의 정보제공으로 태국에서 현지경찰에 압수당하였다.



[ 2009년 태국에서 적발된 북한의 무기밀수관련 사진 : 인터넷자료 캡쳐]



[ 2009년 태국에서 적발된 북한의 무기밀수관련 사진 2 : CNN 화면캡쳐]



또한, 북한은 핵과 장거리미사일등을 개발하였는데, 1950년대 북한은 이미 소련을 통해 핵개발을 시작하였으며, 이를 이동할 수단인 미사일개발을 1960년대 시작하였다. 북한의 핵보유는 2000년대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2002년 미국 정보기관이 여러 경로로 획득한 정보를 근거로 미 국무부 특사 켈리는 핵개발을 인정하지 않는 북한 외교관들에게 핵사찰의 압력증거로 활용하였다.


북한은 2006년 핵실험을 통해 전세계에 핵보유국임을 과시하였는데, 당시, 미국은 1994년 핵위기처럼 북한에 침공할 생각을 하지않았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였지만, 이라크전쟁과 아프간전쟁등으로 대규모 벙커버스터(동굴파괴탄 GBU-27/37)을 소진하여 만약, 북한을 공격할 경우, 3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루어야 한다는 부담과 현실적으로 공격탄 수량부족 등도 고려된 것으로 판단된다.


[ 일명 : 벙커버스터탄 - 인터넷자료 캡쳐]

북한에게 있어 핵과 그것을 이동시킬 수 있는 장거리미사일은 생존과 직결된 분야이기에 북한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다. 미국이 아무리 경제지원을 많이 해준다고 해도 대량살상무기(WMD)의 개발을 포기하는 대가로 서방으로부터 대규모의 경제지원을 받았던 리비아 카다피 정권이 2011년 붕괴된 것을 보여, 더욱 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 한나라당 한 최고위원은 북한의 핵무기가 자위용으로 한국을 향하지 않을 것이라 발언하였으나 당내의 거센 반발(당의 이념과 상반됨)로 그 발언을 취소하였다. 주한 미군사령관 특별고문 스티븐 브래드너와 전안기부장 김 덕 역시, 북한 공격력의 핵심은 핵이 아니라고 말했다. 핵은 상호확증파괴(MAD)의 증거로 북한이 한국에 대해 핵을 사용할 경우, 미국의 대규모 보복공격을 받을 것을 알고 있기에 핵을 이용한 선제공격가능성은 후순위로 밀려났다. 2009년, 김정남 역시, 북한은 체제수호 차원에서 핵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C. 전인민의 무장화



한국전쟁에 관한 김일성의 발언들 중 예비대의 부족을 지적한 부분이 있었다.


한국전 당시, 서부전선에는 1군단(좌로부터 6, 1, 4, 3사단)을, 동부전선에는 2군단(2, 7, 5사단)을 배치, 7개축선상의 주요 도로를 따라 7개사단이 공격1제대로 전쟁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각 전선뒤에는 상황의 변화에 따른 예비대를 가지지 못하였고, 이를 이용하려고 하는 융통성도 부족했다. 후속하는 10, 13, 15 등 3개사단은 전력과 훈련부족등으로 전투에 즉각적으로 투입될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낙동강 전선에 있어서 기존 공격1제대 7개사단과 후속 3개사단, 38선 경비여단을 승격시킨 3개 사단을 추가하여 총 13개사단으로 한미연합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전쟁을 종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이 고착화된 8월경, 북한군의 전력은 한계에 달하였다. 더욱이, 미군의 공중폭격 등 반격으로 많은 실전경험이 있는 고참병사가 다수 사망하고, 새로 징집되었거나 전투의지가 약해보이는 남한 출신의 강제징집병의 비율이 급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되었지만,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소문을 입수하였음에도 인천지역을 방어할 병력이 없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각로가 차단된 북한군은 팽덕회가 지휘하는 80만 중국 의용군이 참전하기전까지 북으로 무질서하게 대탈주를 시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은 중국 의용군을 보고, 예비대의 중요성을 실감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한국전에서의 경험은 북한군이 대병력주의를 채택하는 주된 이유가 되었을 것이고, 전인민의 무장화를 채택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북한의 군사력은 정규군은 120만명(국방백서는 117만명으로 기재)으로, 정규 군 이외에도 노농적위군(직장예비군, 향토예비군과 유사) 360여만명, 교도대(예비역) 60여만명, 붉은 청년근위대 100만명, 준군사부대(인민보안성, 호위사 등) 40여만명등 700여만명에 이른다. 이러한 규모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한국전 당시, 극심한 예비대의 부족을 경험한 결과를 바탕으로 평시에도 전시를 대비해 군사병력을 확보하려는 의도를 보인다.



* 망명한 북한군 관계자들은 국방백서에서 밝힌 117만명의 북한군 정규군 병력은 축소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한국에서 예비전력으로 분류하는 북한군의 교도대, 노농적위군 등을 정규군에 준한 무장세력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어떤 이는 이러한 측면을 고려해 북한군은 400만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북한의 예비전력인 교도대과 노농적위군, 준군사조직(호위사, 국경경비대, 인민보안성 등)의 전투력이 한국의 예비군과는 달리, 상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노농적위군의 경우는 장갑차이외에도, 구형이지만 방사포까지 보유하고 있어 한국의 예비군과는 질적·양적차이가 확연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2008년 열병식, 노농적위군의 방사포 행렬 ]


[ 2008년 열병식, 노농적위군의 방사포 행렬 ]




D. 전국토의 요새화


북한군은 휴전직후부터 1962년까지 1차공사를 통해 대다수 전방지역의 진지(1방어선)를 갱도화시켰고, 1962년 4대군사노선 중 전국토의 요새화 전략을 채택한 이후, 2방어선구축을 실시하여 현재, 중대급 진지를 제외한 대다수의 야포진지와 전차진지도 갱도화하였다. 위와 같은 북한의 요새화 전략은 한국전에서의 경험과 과거, 미국과 혹은 미국의 우방국과 전쟁을 해본 베트남, 아랍연맹군, 이라크등을 보고, 베트남에서는 정치전, 게릴라전, 갱도전 요령을 획득하였고, 아랍연맹군과 이라크군이 전투에서 패배한 원인을 파악, 기갑전, 공중전, 입체전을 대비한 자주화, 장갑화, 장거리사정포, 미사일화를 준비하였다. 특히, 1차 이라크전(1991 걸프전)에서 백만이상에 달하는 후세인의 이라크군이 미군이 주도하는 30여만명의 다국적군에게 어떻게 패했는지를 철저히 연구하였다. 그리고, 미 해공군의 정밀유도무기(PGM)에 대한 방어책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나아가 장차있을 전쟁양상에 발맞추어 소위 ‘주체전법’을 개발하여 운용하였다.


특히, 전국토의 요새화 전략은 북한 공격력의 핵심을 낳았는데, 그것은 시간당 50만발의 포탄을 전방의 한국군진지에 발사할 수 있는 갱도포병전략이 그것이다. 북한군의 공격력의 핵심은 갱도포병이다. 북한군이 실행할 수 있는 작전계획 중에 가장 현실적인 작전계획은 전방에 대규모 포병사격으로 돌파구를 만들어 수도권을 기습하는 것이며, 7일안에 대규모 공세를 통해 막대한 사상자를 내어 백만명이 넘는 주한미군과 그 가족, 외국인들을 인질로 미국과 정치적 협상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다. (일명 : 7일작전계획)


이러한 북한군의 작전계획에 대해 한미 양국은 작전계획 5027로 대응하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북한군의 갱도진지를 파괴하기 위한 작전(일명 : 대화력전)을 운용하기에는 한국군의 야전포병 능력과 벙커버스터탄의 수가 적고, 북한군의 갱도진지가 너무 잘 구축되어있다. 2010년 11월 있었던 연평포격사건 당시, 한국 해병대가 북한군의 포병사격에 대응사격을 하였지만, 현실적으로 발포한 북한군진지에는 타격을 입히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있다.


북한군의 갱도포병은 막을 수 없다. 북한군의 갱도포병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제갈공명과 같은 천재거나 사기꾼일 것이다. 비록, 한미연합군의 전투기와 야전포병이 북한군 포진지를 공격할 수는 있지만, 북한 갱도포병의 수가 너무 많고, 잘 구축되어 있다. 이에, 한미연합군은 전투기로 폭격하여 산정상의 흙을 무너뜨려 포의 출구를 막아 수일간, 북한의 갱도진지를 무력화시키는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에 북한군은 다시 신형갱도 진지를 개발하여 전선에 배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갱도진지를 벙커버스터 아니면 파괴할 수 없다.




[북한군 신형갱도진지 : 국방부 자료 및 언론사 자료 인용]


* 이것을 활용하면, 한미연합군의 공중공격에 북한군 갱도진지는 효과적으로 방호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이를 연구한, 한 군사전문가는 북한의 공격전술을 가히, 천재적이라 표현하였다. 벙커버스터로 모든 갱도를 공격하기에는 북한의 갱도포병수가 너무 많다.



(계속)




[더퍼블릭 = 김덕환 기자]


더퍼블릭 / 김덕환 yan1945081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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